월동 준비

월동 준비

by 황가네 막내 (Posts: 0) » about 3 years ago

11월 첫째주 토요일. 아내는 몇일 전부터 오는 토요일에는 일정을 잡지 말라며 당부를 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월동 준비 해야해” 할뿐 구체적인 답은 피하는 듯 했다. 아마도 일단 나의 노동력을 확보한뒤, 구체적인 일거리는 천천히 생각해 보려는 심산인것 같았다.
 
그 토요일 아침, 아내는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간단한 아침도 준비하고  커피도 끓여 주었다. 아마도 일꾼의 비위를 잘 맞춘 다음 요긴하게 부려먹기 위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런줄 뻔히 알면서도,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이 밉지는 않았다. 예전 같으면 “이거해, 저거해!” 명령조로 말해서 나의 성질을 건드려 싸우기 일쑤였다. 그러던 아내도 이제 결혼 생활 삼십년이 다 되 가니까 이제는 ‘남편 머슴’ 부리는 기술을 많이 터득한 것 같다.
 
아내가 시킨 첫 번째 일은, 잎이 지고 줄기가 메마른 화단의 꽃 줄기들을 밑둥으로부터 1인치 정도만 남겨 놓고 잘라 내는 일이 었다. 줄기는 어차피 겨울이 되면 말라 죽는데, 지저분 하니까 미리 잘라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 일이 끝난후 아내는 여름. 가을 동안 화분에서 키우던 형형 색깔의 국화들을 화단에 구덩이를 파고 옮겨 심는 일을 시켰다. 화분에서 통째로 뽑은 국화는 뿌리가 어지럽게 엉켜 있어서 구덩이의 깊이가 꾀 깊어야 했다. 시골서 자라서 삽질 에는 일가견이 있는 나였지만, 화단 밑으로 잔 나무 뿌리들이 많아서 아내가 원하는 많큼 구덩이를 깊게 파는게 여간 힘이 드는게 아니었다. 아내가 아침 밥을 먹인 이유가 다 있었다.  
 
구덩이를 파고 난후, 국화를 옮겨 심고 주위의 흙을 돋아 국화가 넘어지지 않고 뿌리가 새땅에 잘 내릴수 있도록 아내와 함께 국화 주위의 흙을 발로 꾹꾹 밟아 줬다. 이런 일을 처음 하다보니, 국화 나무가 올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죽지나 않을까? 그래도 내년 봄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줄기에 영양분이 돌고 가을엔 꽃이 피겠지, 하는 우려 반. 기대 반으로 흙을 정성껏 밟았다. 아마 아내도 말은 안 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며 흙을 밟지 않았을까 싶다.  
 
국화는 겨울이 지나면 새봄에 새 줄기가 나고 꽃을 피울 희망이 있는데, 인생의 사계절엔 겨울이 지나면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야 사후 세계에 대한 희망이라도 있지만, 나처럼 아직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겨울이 인생의 끝이다. 나의 지금 나이가 오십 중반 이니까  ‘인생의 계절’로 치면 나는 늦 가을쯤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젠 몸도 마음도 예전같지 않고, 세상적인 것들을 쫓는 열정도 시들해 졌다. 비슷한 또래의 아내도 요즘들어서는 자주 은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꺼내는 것을 보면, 우리 부부도 슬슬 인생의 월동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온것 같다. 빈손으로 시작해서 아이들 낳고 아둥 바둥 살다가 이제야 좀 주위를 돌아 볼수 있게 됐는데... 벌써 늦 가을이 됐다.
   
이솝 우화에 ‘개미와 빼짱이’ 이야기가 나온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열심히 살라는 교훈 이다. 인생 계절에 빗대 보면 ‘청년. 중년때에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노년을 대비하라’ 는 뜻인데, 겨울을 따듯하게 보내려 좋은 시절을 아둥 바둥 살아야 하는 인생사가 조금은 슬프다. 인생이 국화처럼 예쁜 모습과 좋은 향기를 뿌리다가, 겨울에 지고 다시 봄에 새 가지가 나고 가을에 꽃을 다시 필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아둥 바둥 사느라고 남을 배려 할줄 몰랐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던 그 시절로 국화처럼 다시 되돌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십세를 ‘지천명’ 즉,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라 한다. 찾아보니까, 육십은 이순이라고 “귀가 순해져서 모든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수 있는 나이” 라고 한다. 다시 말해, 남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해도 그렇게 까지 흥분하지도 않고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나이란 뜻일 것이다. 일리가 있다. 나이 들었답시고 그게 무슨 훈장이라도 된냥 젊은 세대들에게 꼰대 짓을 한다거나, 지적질을 일삼으면 결코 후 세대에 귀감이 될수 없다. 나도 내 아이들. 그리고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피곤한 늙은이’로 여겨 질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 진다.  
 
별일 없는 한, 지금 옮겨 심은 국화는 올 겨울을 지나고 내년 봄엔 다시 새 줄기가 나고 가을엔 꽃이 필 것이다. 내 인생의 봄은 겨울이 지나면 다시 찾아 오지 않겠지만, 겨울이 오기전 까지는 아직 지지 않은 국화 꽃잎처럼 마지막까지 주위에 향기를 풍기려 노력해야 겠다. 그러다가 겨울이 오면 담담하게 꽃의 화려함을 내려 놓고, 비록 앙상한 가지만 남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아도 노여워 하지 않고,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렇게 나의 겨울을 맞고 싶다.


(0) Answ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