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
예루살렘을 관광하면서 왜 이스라엘이 중동의 화약고라 하는지, 왜 수도를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이 그 화약고에 도화선을 당기는 것인지 피부로 접할수가 있었다. 이스터(Easter)를 막 지난 예루살렘 유적지는 그야말로 돗대기 시장 같았다.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간 길은 지금은 개미굴 같은 상가로 에워싸고 있는데 수많은 인파와 중동 특위의 향료 냄새로 그 길을 따라 가는 동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몇 군데를 지날때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옷자락이 스쳐갔을지도 모르는 벽에 손을 문질러 축복을 받으려는 행렬로 더 혼잡했다. 또 이런 상황에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큰 소리로 관광객들에게 호객행위을 해대서 한마디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길을 따라 가는 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잘 공감되지 않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예루살램 성 밖으로 나왔어도 상황은 그리 나아 지지 않았다. 성 밖으로 나와서 양쪽으로 철재 울타리가 있는 길을 지날 때였다. 왼쪽 옆으로 큰 나무 보호 때문에 추가로 철제 울타리가 설치되 있었는데 길이 갑자기 좁아지니까 인파의 병목 현상으로 사람이 움직이질 못했다. 나는 아내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내 뒤에 바짝 붙었는데, 우리는 뒤에서 미는 인파에 밀려서 앞으로 조금 움직이다가 앞에서 밀려오는 인파에 다시 뒤로 밀려 뒷거름 치는것을 반복했다. 우측통행 같은 룰도 없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겠다는 인파로 인하여 우리는 꼼짝없이 갇혀서 앞뒤로 밀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의 10 여분만에 20미터 남짓한 구간을 겨우 빠져 나올수 있었다.
인파에 갇힌 10여분 동안 어쩔수 없이 뒤에서 미는 사람들, 앞에서 밀고들어오는 사람들, 그리고 옆에 같이 낑겨 있는 사람들을 볼수 밖에 없었다. 검은 코트에 검은 모자를 쓰고 옆머리만 길러 꽁지머리처럼 꼰사람들, 히잡으로 얼굴만 내민 여자들, 미국에 유태인 동내에서 쉽게 볼수 있는 머리에 동그란 키파를 쓴 유대인들, 수염은 길렀는데 특이한 복장은 입지 않아 무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그 나머지 사람들 등등. 그들은 욕설이나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굳은 표정으로 한치의 양보없이 각자의 길을 가려할 앞에 사람을 떠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안에 갇힌 나도 뒤돌아 갈수 없는 상황이니까 아내를 밀며 앞으로 나아갈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폭력을 시작하면 겉잡을 수없는 사태로 번질것 같았다.
이번 이스터 주말에 스리랑카에서는 극보수 무슬람단체의 폭탄 테러로 270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성경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 가면서 거기에 있는 다른 민족을 다 죽이라고 명하신다. 그렇듯 그들은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꿔도평화롭게 친구처럼 공생하며 살기가 어렵다. 이 조그만 예루살램 도시안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목숨걸고 믿는 크리스챤들, 모하마드의 재림을 기다리는 무슬람들이 한지붕 아래서 서로 다른곳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문론 이들은 지역을 구분해 놓고 서로간에 충돌을 피하면서 살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예루살램 성벽 밖의 그 번화가 통행로처럼 부딛이고 밀치면서 각자가 믿는 길을 간다. 그들중 일부 극단 보수주의 자들은 어려서부터 교육받아, '나의 신은 맞고, 너의 신은 틀리다'. 따라서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을 해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것이고, 오히려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한 충성이라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법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나 배려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이번 여행은 나한테 있어서는 심적으로 힘든 여행이다. 샌디에고에서 학생들 선교에 일생을 바치고 있는 목사님 부부, 그분들과 20년 가까이 같은 비젼으로 그분들을 돕고 있는 부부, 또 그분들을 멘토로 생각하고 따르는 나의 아내. 그리고 삼십년 가까이 교회문을 들락 거리지만 크리스쳔이 아닌 나. 이렇게 '개밥에 도토리'같은 내가 포함된 여섯명이 24시간을 같이 먹고 생활하다 보니까, 도토리인 나만의 정신적 자유 공간이 허용되지 않는다. 아내의 믿음을 존중하고, 그분들을 인간적으로 좋아 하는데도 나는 점점 더 숨이 차오른다. 그분들은 며칠후에 나를 요단강에서 세례받게 하려고 노력 하시는것 같은데 나는 더더욱 부담이 된다. 어차피 하나의 종교를 선택해서 잘 믿고 이승에서 착하게 살다가 죽어서도 영생을 누린다면 뭐가 나쁘겠는가? 내가 뭐 그렇게 소신있는 사람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닌데, 좋은게 좋은거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은 방향을 보고 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못하니까 나도 괴롭다. 만약에 내가 세상에 나오기전부터 나의 운명이 정해졌다면, 또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나는 왜 가만이 있을 권리는 없는 것일까?
이곳에 와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보면서, 또 그들 속에서 어떠란 신념도 없이 이리저리 떠 밀려 다니고 있는 나를 돌아보게 됬다. 많은 사람들 눈에는 내가 한심하게 보여 질수도 있겠지만, 어떤면에서는 믿음이 없는 내가 더 평화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최소한 나는 그들을 해할 종교적 이유가 없어서 그들을 적대감없이 담담하게 바라봐 줄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이 세상은 나같은 사람도 필요로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