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ra의 석공처럼
Petra의 석공처럼
이스라엘 여행중 접경국인 요르단(Jordan)의 Petra를 다녀왔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새벽 세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 요르단 국경에 도착해서 한시간 정도 입국 절차를 밟고 또 버스로 2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거리였다. 이 스케쥴을 당일치기로 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는데, 이십 여년전 이스라엘에서 7년정도 사신분 내외가 꼭 한번 가볼만 한곳이라고 추천을 해서 같이 가게 됬다. 사실 요르단에 Petra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됬다. 그리고 이곳이 세계 7대 불가사리 건축물 이라는 것도 아내가 알려줘서 알게 됬다. 아내는 여행 가는 곳을 사전에 공부를 하는 반면, 나는 내눈으로 보기 전에는 궁굼한게 없는 스타일이다.
Google에서 사진으로 본 Petra의 사진과 실제로 본 느낌은 확실이 달랐다. 아니 그 웅장함에 기가 질렸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사진으로만 받을때는 '아 석굴암처럼 바위절벽에 큰 조각을 했구나' 하는 정도 였는데, 실제로 보니까 기원전 300년 부터 살았던 원주민들이 자기네 동네에 만든것이었다. 그것도 몇 백만년전 지진으로 바위 산이 두쪽으로 갈라진 곳을따라 신선한 물을 공급받는 작은 수로도 만들고, 갑자기 범람하는 물을 빼기위해 지름 2미터, 길이 80여 미터나 되는 배수로를 바위산 밑으로 뚫기까지 하면서 만든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건축물이 아니고, 자기들이 삶에 더 큰 만족을 주기 위해 만든 조각물들이었다.
가이드에 의하면 그당시 원주민들은 2만 5천정도 이곳에서 주거했을 것으로 추정 한다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문헌이 있는게 아니고 돌산을 층층히 깍아 만든 스테디움(주민들의 회의때나 축제때 쓰였을 것으로 추정)의 수용 숫자가 5천명정도 된것으로 미뤄 전체 인구를 추정한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당시 2만 오천명이 주거한 도시는 흔치 않았겠지만 일할수 있는 남자 성인 기준으로 하면 오천명이내로 추정되는데, 이들이 꼭 필요한 주거시설, 무덤등을 만드는것은 돌벽을 뚫어서 만든것은 이해가 가는데, 몇십 미터 높이의 돌 절벽에 신의 형상을 조각하는것도 아니고 정교하게 건축물을 조각 했다는게 믿겨 지지가 않았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철기시대 초기라 아주 초보적인 도구만 사용해서 돌을 쪼아냈을텐데, 그런 규모의 건죽물 조각 했다는게 상상도 안되고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도 안됬다. 단지 쉽게 추정 되는것은 그 당시에 Petra 원주민들은 자본이 풍요했고 외부와의 교류도 많이 활발했던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돌산골에 사는 사람들이 그정도 조각 건축물을 동내에 만들어 즐길 여유가 없었을것이기 때문이다. Petra는 로마 시대때서부터 내리막길을 걸어서 도시 자체가 사라졌다가 1812년 스위스 탐험가에 의해서 발견 됬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그당시 원주민들의 생활과 조각물들 만든 이유들은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이런 경이로운 것을 볼때 '나란 존재는 긴 역사의 물결 속에서는 정말 보잘것 없는 존재' 라는 것을 느낀다. 태평양에 비 한방울 떨어지듯, 어느날 죽어도 지구는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에게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심지어 나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에게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의 클라이언트들은 처음 약간은 불편 하겠지만 쉽게 비슷하거나 더 나은 서비스를 찾고 나의 부재를 곧 잊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까, 내게 중요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아내, 두 아들들, 형과 누나들, 친구들, 그리고 나를 따듯한 눈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니까, 내 존재의 의미가 조금이나마 살아난다. 많이 남아 있는 인생은 아니지만 Petra의 석공처럼 조바심 내지 않고, 결과물의 세간의 평가에 연연해 하지도 않으며, 긴 호흡으로 내게 주어진 세상의 일을 묵묵히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