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과 상놈
양반과 상놈
어릴때는 애들 사이에서 특이한 성을 가진 애들을 '상놈'이라고 놀리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성을 가지고 장난 노는 것이 용납되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자기가 무슨 김씨 무슨 이씨 하면서 뼈대있는 양반 출신임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기 스스로가 내세울 것이 없어서 조상까지 들먹이는지는 몰라도, '나는 특별한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조상까지 팔아 먹는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한국사에 오랜세월 깊숙히 뿌리내린 계급사회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낮선곳을 여행할때는 현지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는 습관이 있다. 현지인들이 말할때 하는 행동 그리고 표정들을 보면 내가 실제로 환영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 쉽게 알아 챌수 있다. 예루살램 유적지를 이틀째 돌아보고 있을 때였다. 예루살램에서의 첫날,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옆머리를 길러 꼬아 내린 사람들에 대한 궁굼증은 같이 여행간 분의 설명과 구글의 도움으로 이미 풀렸었다. 그들은 예메나이트(Yemenite) 라는 집파로 구약의 지침을 아직까지 지키는 극보수 유대교인 이었다. 예루사렘성 안이나 유대교의 성지중 하나인 Western Wall(Wailing Wall 이라고 일컬음)에서 이들을 쉽게 볼수 있는데, 호기심의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나를 못본척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다고 억지로 나를 외면하려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한다는 표현이 맞을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의 얕은 성경 지식으로 유대교인들이 성경에서 했던 행동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등등을 머릿속으로 훓고 지나가면서, '아... 유대교인들의 선민 사상, 즉 이방인들과는 말도 안 섞었었던 옛 전통에 기인한 것이었구나' 하는 결론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치밀어 오르는 부하를 주체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 너 잘났다, 병신 쪼다야! 그렇게 살다가 되져라!' 하고 마음속으로 저주했는데, 그게 내가 할수있는 치졸한 복수의 한계였다.
이스라엘은 다름 문명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인종간의 차별(discrimination)은 법으로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같은 이방인들을 배척하는것은 물론이고 같은 유대인(Jews)끼리도, 차별이 심한것으로 안다. 가장 인구가 많은 이스라엘계 유대인, 그 다음 아랍계 유대인, 이디오피아계 유대인등, 이들은 사는것도 섞여 살지 않고 각자 지역을 구분하여 따로 따로 산다. 현지에서 산 경험이 있는 여행 동반자 지인에 따르면, 이들은 조폭들이 다른 지역에는 가지 않는 것처럼 이들도 다른 주거 지역는 들어가지 않고, 잘못 들어갔다가는 돌을 맞을 수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도 외부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역사적, 종교적, 인종적 갈등이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슴을 짐작할수있다.
예수님이 잡혀가시기전 피눈물을 쏟으며 기도하셨다는 겟세마네동산이 위치한 감람산(Mount of Olives)은 성지이자 공동 묘지이다. 묘지로 쓴 역사가 3000년 정도라고 하니, 예수님 이전에도 유대교에서는 이곳을 명당으로 여겼었나 보다. 그때부터 시작해 대략 150,000개 정도의 유골이 메시아의 재림을 기다리며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곳은 예루살렘 시내의 중심지이고 해서 땅값도 비쌀텐데, 망자들은 비싼돈을 지불해서라도 성지인 이곳에 묻히기를 희망했고 또 계속 묻히고 있다. 감람산 아랫자락에는 한눈에 보아도 옛 서울의 판자촌을 연상케 하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이곳은 아랍계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이다. 실로암을 가느라두 이동네 아래쪽을 지나 갔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예메나이트 사람들과는 달리 인사를 건내긴 하는데 마치 시골에서 껄렁대는 청년이 봉사활동 나온 서울 대학생에게 말거는 투였다. 곳곳에 쓸래기가 그대로 방치되 있고, 여자들이 혼자 다닐만한 곳은 절대 아니었다. 차라리 이런곳에 묘자리를 쓰고 감람산 묘자리에 사람이 살아야 하는데, 살아있는 인간도 돈있는 죽은 사람한테는 좋은 자리를 양보해야 하나보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달라고 이미 의사 표시를 했었다. 그리고 감람산 묘 자리를 보면서 그 확신이 더 강해졌다. 아무리 좋은 명당에 좋은 관에 묻어도 육체는 썪어 없어진다. 죽어서도 후세들이 쓸 땅을 차지하고 누워있고 싶지 않다. 이사를 갈때도 새로 이사올 사람을 위해서 집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고 떠나듯이, 이전 세대가 물려준 이 세상을 깨끗이 잘쓰고 다음 세대에 잘 물려줄 의무가 우리 세대에 있다. 종교적인 가치관을 떠나,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것에 대한 긍지를 갖고 사는것은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서 남에게 혐오감을 준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같이 쓰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리고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계열이 다른 유대인이라고 차별하고 증오하는 것은, 아비덕에 양반으로 태어나 갑질하는 소인배와 다를바가 없다. 아마 하나님도 그런 것을 좋아 하시지 않을 것이다.